2024년 9월 25일 수요일

내 칩 만들기에 다리를 놓아준 오픈-소스 반도체 설계도구

내 칩 만들기에 다리를 놓아준 오픈-소스 반도체 설계도구

작년(2023년) 여름 "내 칩 MPW 서비스" 공고문을 접하고 잠시 추억에 잠겼었다. 내 칩을 처음 만들어 본 것은 30여년전 이다. 서울대 반도체 공동 연구소에서 학생들의 설계를 칩으로 만들어 준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었다. 그시절 VLSI 설계 과목이 대학원에 개설 되어 있었다. 물론 교과서 조차 모눈종이에 색연필로 그리는 수준이었으니 학교에 변변한 설계 소프트웨어가 있을리가 없었다. 겨우 회로도와 PCB 그리는 도구가 있었고 집적회로 간판을 단 연구실에 알테라사의 맥스 플러스가 도입되는 수준이었다. 다행이 학교에 인터넷이 개통되어 있어서 검색 끝에 Magic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찾아냈고 소스 코드를 받아 썬 워크스테이션에서 컴파일 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 그때 경험이 반도체 설계 도구가 평생 관심사가 된 계기였다.

"내 칩 MPW 서비스" 공고문에 "아날로그 CMOS"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표준 실리콘 공정인데 굳이 아날로그와 디지털 회로를 구분하는 이유가 있을까? 몇차례 통화와 전자메일을 주고받고 회로의 구분이 아니라 "풀-커스텀"이라는 뜻임을 알게됐다. 예상 했던 대로 디자인 룰을 공개 해 줄 터이니 그에 맞게 그려서 제출하면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알아서 그려오라는 요구는 30년 전에도 그랬다.

"내 칩 MPW 서비스"는 공공 연구기관에 설치된 반도체 제조공정을 학생들에게 개방해 시스템 반도체 설계 인력 양성에 기여 한다는 취지다. 내 칩을 만들어 보겠다며 흔히 접하는 파운드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상용의 설계 자동화 도구에 맞춘 검증된 방법론과 각종 표준 셀  및 IP의 제공을 기대한다면 당연히 유료 파운드리 서비스를 찾아야한다. 계약을 맺고 비밀 유지 서약 없이는 파운드리 킷의 내용을 알 수도 없음은 물론이다.

최근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결실로 리눅스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 개발도구에 커다란 성과를 이뤘다. 하드웨어 설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반도체 설계 도구 역시 큰 발전을 이뤘다. 겨우 레이아웃 도면을 그리는 소프트웨어와 회로 시뮬레이터에 불과 헀던 도구들의 영역은 베릴로그 시뮬레이션 과 합성 그리고 자동 배치배선, 마스크 레이아웃 생성에 이르기 까지 반도체 설계의 전과정을 아우른다. 더욱이 최근 세계유수의 IT기업들과 다소 낮은 정밀도의 반도체 공장들이 손잡고 PDK들을 개방하자 오픈-소스 반도체 설계 자동화 도구 운동은 더욱 가속화 되어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대행사까지 등장하여  낮은 비용으로 내 칩 제작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학생과 연구자들은 물론 취미가들의 MPW 제작사례가 늘고 있다. 이들의 PDK는 NDA 따위는 필요없이 표준 셀과 오픈-소스 설계도구들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내 칩 MPW 서비스"는 풀-커스텀 설계다. 사실 알아서 설계도면을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의미있는 디지털 알고리즘을 구현하기 위해 수천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가는 레이아웃을 그리기는 불가능 하다. 오픈-소스 도구들이 성숙해 있다니 내칩 MPW 서비스의 CMOS 공정용 설계 플로우를 세워볼 만 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합성기와 자동 배치배선기에 사용가능하도록 표준 셀을 그리면 될 일 아닌가 싶었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나만의 RTL 합성 방식의 설계와 검증 플로우를 구축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마음먹고 시작한지 일년이 다되가는 지금 겨우 틀이 잡혀나가고 있다. 아쉽게도 두번의 테스트 칩 제작에 실패 했지만 공정을 맡아준 기관의 협조를 받아 상용 툴과 레이아웃 교차 검증을 어느정도 이뤄낸 지금 곧 실리콘 검증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일년여 동안 계획도 없던 밤샘이 여러날 이어지기도 했다. 더이상 없을 것 같았던 밤샘작업이라니, 이게 다 "내 칩 MPW" 때문이다. 오랜 꿈을 이루려는 판에 밤샘 쯤이야!

요즘 반도체 관련 뉴스에 인공지능이 빠지지 않는다. 시스템 반도체 열풍에 이어 이동통신이 휩쓸고 가더니 이제 인공지능이 일상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대학의 수준이 이를 따라잡고 있는지 의문이다. 두어세대 전에는 대학의 수준이 동네 전파사를 훨씬 뛰어 넘었지만 지금은 한참 뒤쳐진 느낌이다. 그만큼 학생들의 갈증도 더해졌다. 인공지능이 되었든 이동통신이 되었든, 첨단  정보통신 산업의 기초는 트랜지스터 아니겠는가. 대학의 학과목 사이의 경계가 너무 넓다. "내칩 MPW 서비스"가 트랜지스터 회로에서 시스템 반도체로 뛰어버리는 격차를 채울 수 있길 바란다. 내칩 MPW에 오픈-소스 설계도구를 적용하므로서 반도체 공정, 알고리즘의 이식, 설계도구 개발 등 다양한 분야의 반도체 산업을 체험할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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